스오피
생존에 집착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능하다. 차의성이 그걸 해냈으니까.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어후 진짜 불쌍한 새끼 차의성은 진짜 문태영을 존나게 사랑한다. 이 단어가 차의성의 사랑을 가장 바르게 표기해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진짜 존나게<라는 단어가 아니고서는 그의 사랑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 물론 문태영도 차의성을 사랑한다. 문태영도 차의성을 위해 차의성의 과오와 선택을 돌이키기 위해 1회차에서의 목숨을 바쳤고 그게 시간을 돌이켜 멸망을 막아낸 최초의 행동이 되었으니까. 사랑의 크기를 비교하자거나 문태영은 차의성을 덜 사랑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님.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주는 것도 어지간한 결의와 마음으론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시골마을에서 애 키우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선생님이. 물론 그가 S급으로 각성한 것을 숨기고 복수의 칼날을 갈며 살아가던 복수귀라는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차의성이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랑만을 위해 선택한 것, 그리고 그것이 포기하게 만든 것 같은 것 말이다. 차의성은 이미 세 번을 돌아왔다. 그리고 그 세 번의 기억은 전부 그의 죽음을 기점으로 잘려 있다. 한 번은 몬스터, 한 번은 마왕 문태영으로 인해 죽었다. 그로 인해 차의성은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을 원동력 삼아 살아가고 있고, 자신을 한 치의 실수가 죽음으로 직결되는 낭떠러지에 몰아넣어 놓고 살아간다. 문태영의 존재 없이는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날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PTSD와 죽음 그 순간에 대한 트라우마도 자꾸만 그를 괴롭힌다.
그러다 밝혀진 것 하나, 그의 첫 번째 죽음의 순간 뒤로 이어지는 기억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시스템이 아닌 외신이 일깨운 기억이다. 차의성을 문태영의 서브로 이용하기 위해-그리고 엔딩을 떠올려 생각해 보자면, 자신이 지구를 잡아먹는데 방해 요소로 이용될 것이 분명한 걸림돌을 제 아래에 둘 속셈이겠지. 그러면 문태영과 차의성이 자기들끼리 죽이든 사랑을 하든 관계 없다. 자신에게 타격이 오지 않으니까.
하지만 차의성은 이런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다. 사실 차의성은 그리 이성적인 편은 아니다. 뒤늦게 후회하면서도 굉장히 감정적인 면모를 보이고, 만약 자칫 발을 잘못 디뎠다면 정말 외신의 편에 섰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1회차 당시 죽음 이후의 순간에는 자신을 외면하고 지옥에 버려둔 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큰 증오를 느끼며 다함께 죽자!! 라는 심경으로 지구 멸망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러다 문태영을 만나 후회했고 오직 문태영이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에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접 자극하는 던전에도 들어가 외신과 접선을 시도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먹히지 않자 자살시도까지도 했지만 도리어 자신은 멸망 버튼을 누를 인간 1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리고 절망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나온 것이, 자신의 손으로 문태영을 죽이는 것.
그리고 회귀, 회귀, 회귀의 반복 끝에 다시 문태영의 연인이 된 것은 3회차였다. 그마저도 2회차의 죽음 당시 마왕이었던 문태영이 멸망을 막기 위해 용사 차의성을 죽이면서 시스템의 국고가 채워졌기 때문에 직접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그 과정에서 차의성은 죽음에 대한 강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됐다. 문태영의 하얀 머리카락이나 거대한 푸른 눈을 볼 때면 PTSD를 느끼고 악몽도 자주 꾼다. 그럼에도 결국 선택한 것은 사랑이었다. 문태영을 구하기 위해 이상 현상을 보이는 던전에 맨몸으로 뛰어들고, 문태영을 향하는 공격을 몸으로 막으려고 시도하고. 문태영의 손에 죽음을 맞겠다고, 그래서 세상을 지키고 문태영과 행복해지겠다고 하면서도 문태영은 그 모든 기억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자신 답지 않은 행동과 생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쩌겠는가, 사랑에 빠지면 답이 없어지는 게 인간인데.
그러니까 차의성은 문태영을 존나게 사랑한다. 1회차와 3회차의 기억만 가지고 있게 될 문태영과 달리, 이후에 문태영과 다시 연인이 되고 죽고 대립각을 세우고 죽고 또 우리는 모를 수많은 죽음을 품은 채 다시 문태영과 백년해로하고 싶어할 정도로 사랑한다.
이기적이고 자신의 생명을 1순위로 생각하는 사람이, PTSD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이 그 모든 걸 이겨내고 미루며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어떤 걸까. 지구 용사 은퇴 프로젝트는 장장 7권에 이르는 작품이고, 그 대부분이 차의성의 독백으로 이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이 느리다고 하겠지만 나는 이 속도가 이 작품의 적정 속도라고 생각한다. 이보다 빠르면 그들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다. 이보다 느리면 늘어진다. 혹은 그들의 선택에 몰입할 수 없다. 그들의 선택이 어쨌든 슬픔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음을 잊게 된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느린 이야기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그 속도조차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헌터물이고 전투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주된 것은 감정인 작품을 찾는다면 나는 이 작품을 당당하게 추천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