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 감상완료 코랄리 파르쟈
루키즘은 어떻게 우리 사회를 망치고 있는가? 노인을 사회 변두리에 방치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는 어떻게 망가져가는가. 이 영화는 극단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그 세계에서 외면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영화, <서브스턴스>의 주인공은 한 때 누구보다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했던 여배우 엘리자베스 스파클이다. 이제는 유일하게 남은 '스파클 유어 라이프'라는 운동 채널에 출연하는 것만이 삶의 낙이지만, 한 때는 오스카에서 상을 탈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최고의 배우였다.
다른 사람들은 한창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나이에 이미 전성기를 겪고 추락하는 것만이 남은 삶은 어떤 삶인가. 엘리자베스는 아름답고 커다란 집과 집을 청소해주는 청소부를 부릴 수 있는 부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사회에서 잊혀지고 외면당하는 공포를 함께 느끼고 있다. 자신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당신이 나이 들어 전성기의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브스턴스는 그렇게 외부로 밀려난 노인들을 자극한다. 젊은 시절의 나, 그것이야말로 더 나은 나. 그것이야말로 행복해질 수 있는 나. 자기혐오가 나를 침범하기 전의 나. 그렇게 노인들의 귀에 속삭이고, 실효가 있는지 아닌지도 의심하면서도 약에 손을 대도록 만든다.
그리고 효과는 굉장했다! 사회에서 밀려났던 나이 든 엘리자베스는 젊고 아름다운 '수'가 된다. ID 카드도 없고 실제 등록된 인물인지도,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알 수 없는 인물이지만 오직 그 아름다움 하나만으로 세상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간다. 오랜만에 마주한 사람들의 관심은 반짝이고, 사랑은 아름답고, 동시에 중독적이다.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로서의 일주일을 점점 견디기 어려워지고, 수는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수는 일주일의 교체 주기를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극단적인 노화가 시작된다. 수가 엘리자베스의 등골을 말그대로 빨아먹으며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나이들수록 수는 아름다워지고, 사랑받는다. 엘리자베스로 돌아가면 마치 마귀할멈처럼 히스테리를 부리고 수를 향한 질투에 몸서리친다.
이 모든 것은 능력이 아닌 외모를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건강하게 늙어가는 여배우에게 관심이 없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젊고 아름다운 새로운 여성이다. 그리고 그 여성이 시들기 시작하면, 그들은 가차 없이 버린다. 그래도 괜찮다. 겉보기에는 반짝이는 아름다운 세상에 새로 들어올 여자들은 많으니까. 그리고 그걸 판단하는 건 늘 나이들고 머릿속에는 가슴과 엉덩이만 있는 남자들이다. 아직 머리가 검고 주름도 별로 없는데도 사회에 불리지 못하는 엘리자베스와는 다르다. 가슴을 까고 성기만 간신히 가린 거적데기만 걸친 여자들에게 눈을 돌리고, 옆에서 음식을 나르는 여직원의 치마 아래로 슬쩍 드러나는 엉덩이 아래 살에 눈이 휙 돌아가는 추잡한 모습을 숨길 생각도 않으면서, 여자는 50이 되면 쓸모가 없다고 말하는 그들은 흰머리가 성성해지고 얼굴에는 주름과 살집이 가득해도 사회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투자자라는 이름으로, 사장이라는 이름으로. 그럼에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는 수에게 등골을 뽑아 먹히며 늙어간다. 하지만 그것이 오롯이 수에게 뽑아 먹힌 것인가. 실질적으로 엘리자베스를 배제하고 늙게 만드는 건 자본주의라는 이름 아래에서 루키즘을 행하는 늙어빠진 할배들이다. 번식 능력이 있기는 할는지 의심될 정도로 늙은 그들은 25살을 갓 벗어난 젊은 여성들을 희롱하고, 그들을 아름다운 기계처럼 대하고 소모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돌아가는 세계는 과연 제대로 된 세계인가. 루키즘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들이대지는 잣대지만, 과연 둘 모두에게 같은 잣대로 들이밀어지는가. 고어라는 방식으로, 끝내는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죽음으로 완결되는 추락의 이야기임에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