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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필립 에스멘더. (2020. 04. 18 백업)
청월광 25-08-20 05:38 7

간혹, 도서관에 있는 책을 읽을 때면.

같은 마을에 있는 누군가의 이름을 자각할 때면.

과거라는 이름에 묶인 책의 한 페이지가 펼쳐지게 되곤 했다.

 

부드러운, 질 좋은, 매끄러운 종이가 파라락 소리를 내며 넘어간다. 온화한,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어 희게 빛나는 방 안에서 동그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톡, 톡, 떨어진다. 비조차 오지 않는 하얀 날, 먹구름이 눈물을 쏟아내는 까만 날.

그 날은 필립 에스멘더의 종장을 찍은 날이었다.  펠리체의 종장이기도 했다. 흰 종이에 사랑을 써내려가던 달콤하고 섬세하던 손길은 그 어느 날에 끝맺어졌다.

 

 

펠리체는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달콤하고 애정어린 글을 쓰는 이유는 펠리체, 그녀가 무엇보다 글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똑 닮은 쌍둥이나 그녀를 사랑해주는 부모님이나, 거의 평생에 가까운 나날을 함께해온 그녀의 친구를 사랑하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어도 그 외의 다른 무엇보다도 그녀는 글을 사랑하며 살아왔었다. 글이 아닌 다른 길을 생각해 본 적 없었고,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할 날이 올거라는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그녀는 아주 오래 펠리체 카시미로였고, 그와 비슷한 세월동안 필립 에스멘더였다.

필립 에스멘더로 살아갈 때의 펠리체는 몸에 딱 맞는 옷을 입고,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을 꼼꼼히 올려묶은 채 살곤 했다. 섬세하게 움직이는 손끝이 그려내는 다정한 글씨들은 부드러운 애정을 써내려갔고, 그렇게 써내려진 애정은 하나의 소설이 되곤 했다. 펠리체는 그것이 영 마음에 들었다. 다정하고 아름다운 애정 서린 글이 다른 이들에게 보여지는 것이라던가, 다른 이들이 제 글을 읽고 작가의 꿈을 키우는 것 같은 것 말이다. 꿈이라는 그 달고 부드러운 단어가 주는 사랑스러움은 펠리체에게 다시금 애정을 글로 뽑아낼 원동력이 되곤 했다.

그렇게 글을 쓰며 몇 해였다. 몇십 해였고, 몇백 해였다. 필립 에스멘더로서의 삶은 펠리체에게 큰 덩어리가 되어갔다. 필립 에스멘더가 아닐 때가 적었고, 펠리체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그녀를 필립 에스멘더로 생각했다. 그것이 그녀의 가장 큰 지분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큰 지분은 순식간에 깨어졌다. 소문, 그 머저리같은 소문. 그리고 그 소문을 믿은 그 사람들. 그 멍청하고 멍청한 소문 따위를 믿었던 사람들의 욕설과 낙인은 필립 에스멘더라는 작가 하나를 시장에서 내몰았다.

그녀는 더이상 필립 에스멘더가 될 수 없었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글을 쓰는 필립 에스멘더가 될 수도 없었고, 되더라도 더이상 글을 팔 수 없었다. 모든 게 오해임이 밝혀졌음에도 필립 에스멘더는 이미 종막을 맞았다. 갈기갈기 찢긴 종막은 펠리체 또한 갈갈이 찢어 그 운명을 함께했다. 펠리체의 세상이 기울었다. 펠리체의 책이 덮였다.

펠리체는 아주 오래 집 안에서만 살았다. 필립 에스멘더의 종막 이후로 오래 그랬다. 카오스밸리에 오기 전까지 내내 집 밖으로 나서는 일이 없었다. 창백한 얼굴을 무릎 틈에 숨긴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바닥에 웅크려 살았다. 그저 그렇게, 아주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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