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로드 자유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제에는 옛 기억이 불러일으키는 짙은 우울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어둑한 바깥을 울리는 타닥타닥 잔 소음이 길기도 했다. 펠리체는 어둑한 빛이 내린 창 밖을 바라보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몰려오는 과거의 기억이 무겁게 머릿속에 잠겨들었다. 검었다.
펠리체 카시미로는 아주 오래 작가 생활을 했던 악마였었다. 섬세하고 달콤한, 아름답고 끈적한, 사랑스럽고 애절한 로맨스 소설을 쓰던. 그 음울하고 느릿한 악마가 썼다기에는 너무나 다디 단 글을 쓰곤 하는 이였다. 본명을 쓰지는 않았으나 그것이 그가 작가 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어주지는 않았고, 다만 그의 작가로서의 생명이 끝났을 때 그 깊이 음울한 불명예를 대신 끌어안고 사라져 줄 정도는 되어주었더랬다.
필립, 필립 에스멘더.
그 여섯 글자로 이루어진 짤막한 이름. 펠리체의 죽은 작가 생활이 남긴 유일한 유산. 시장에조차 팔리지 않는 작가의 필명. 표절 작가라는 불명예를 끌어안고 나락에 떨어진 그 한명의 악마. 이제는 어딘가에 묻혀버린 펠리체의 영혼, 사랑, 직업.
펠리체는 그 뜯겨진 영혼을 깊이 애정했다. 그 스스로가 살아오며 키워온 영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더이상 그 영혼을 애정할 수 없게 되었을 때가 가장 아팠다.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짙은 우울의 바다에 빠져 죽어가는 것 같았다. 품에 끌어안고 살았던 그 애정이 표절 작가라는 루머에게 뜯겨나갔을 때 펠리체는 한 번 죽음을 겪는 것 같았다. 790년, 그리고 그 거의 대부분의 삶이 죽은 것과 같았으므로.
펠리체는 그 날 내내 울어야 했다. 인정할 수 없었고, 인정해야 했고, 지쳐 쓰러질 때 까지 애정을 토해내야 했다. 방 바깥으로 나가지도 않고 메말라갔고, 방 바깥의 모든 질책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했다. 원하는 것만 믿는 이들을 믿으려 들지 않았고 필요치 않은 것을 보지 않는 이들을 애정하지 못했다. 깊디 깊은 트라우마였다. 펠리체는 누군가를 믿는 것에 깊은 염증을 느꼈다.
카시미로, 카시미로. 펠리체 카시미로.
하지만 염증을 느껴봐야 무엇하겠는가? 깊은 염증이 있든 없든 이미 잃은 이름과 사라진 직업은 돌아올 수 없었다. 하얀 종이에 쏟아진 먹물 위로 아무리 글을 써본들 누가 볼 수 있겠는가. 펠리체는 눈물젖은 얼굴을 들고 비 내리는 창문을 바라봤다. 얼마나 오래된 날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굳은살이 배겼던 손이 메말라 부드러운 살갗과 마디마디가 튀어나온 모양새만 남겼고, 어깨는 앙상했고 몸은 비쩍 마른 뼈다귀 같았다. 하얀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진 채 하늘만 바라보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한참, 아주 긴 시간.
....메디, 카오스 밸리에 가고 싶어. 같이 가줘.......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